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문단 편집) === 공화국을 구하다 === >'''"여러분은 어떤 정부가 승리했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국민공회의 정부입니다. 빨간 보닛을 쓰고 거친 모직 옷을 입고 나무신을 신은, 보잘 것 없는 빵과 질 나쁜 맥주를 먹으며, 너무 피곤해서 더이상 깨어서 논의할 수 없을 때는 그들 집회실의 마룻바닥에 깔려 있는 이불 위로 잠을 자러 갔던 열정적인 자코뱅의 정부입니다. 프랑스를 구했던 것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황제의 거처를 자랑으로 여기듯 저는 이 사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 훗날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도지사 장봉 생탕드레가 국민공회 시기는 더 망한 상황에서 이겼는데 왜 나폴레옹 황제는 그걸 못 하냐고 까는 연설.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국민공회 정부가 들어섰고, 왕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더이상 파리 시민들의 격분에서 국왕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했고,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상퀼로트]]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지롱드파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파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지롱드파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한 반면 자코뱅은 확고한 혁명의 완수와 공화국 체제의 완비를 위해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코뱅은 파리의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벌어진 투표 끝에 승리하게 된다. 국민공회 안에서는 지롱드파가 갈수록 [[몽테뉴파]]에 밀려 기세를 잃어갔다. 거기에 지롱드 계열의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지롱드파는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결국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마르세유, 보르도, 리옹 등지에서 군대를 동원해 파리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으로 부당한 체포가 연이어 일어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 체포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6월 2일,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의회에 난입하여 시민들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들의 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제명되어 지롱드파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만다. 이로써 국민공회는 자코뱅이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자코뱅은 국민공회의 다수파가 아니었다. 봉기로 인한 상퀼로트의 영향력과 전쟁의 급박함 탓에 다수파였던 지롱드파가 자코뱅의 주도를 묵인한 것에 가깝다. 이것은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안의 반(反) 혁명 세력들은 혁명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곳곳에서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부 [[방데 전쟁]]이다. 이는 지롱드파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들이 내전 준비를 하고 있던 리옹, 보르도 등지로 확산되었다. 또한 프랑스를 고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에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나폴리, 교황청 등이 가담하여 대(對)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윽고 프랑스 공화국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1793년, 프랑스의 80개 지역 중에서 60개가 파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북쪽과 동쪽에서 프랑스로 침공하고 있었으며, 영국군이 남쪽과 서쪽에서 침입해 오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정부는 고립무원이었고, 당연히 파산 직전이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두 번 연속으로 외세와 연계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도주하기까지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혁명의 승리를 위해 창설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 한 명이 된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를 단순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의 한 명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조르주 당통]], 강경파 [[장폴 마라]] 등을 중재하며 자코뱅을 이끄는 지도자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자코뱅이 국민공회 내에서 다수파는 아니었을지라도, 국민공회의 다수파는 이 시점에서 자코뱅이 공화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공안위원회 역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요청에 응해 창설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공회기의 상당기간 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사실상의 프랑스의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지롱드파]]에 의해 지연되었던 급진화한 새 헌법이 포고되었다. 여기서 [[보통선거]], [[저항권]], 노동과 생계유지의 권리, 모든 사람의 행복이 정부의 목표이며 인민의 권리는 손에 넣을 수 있고 실시되어야 한다는 공식성명이 이뤄진다. 이는 근대국가에 의해 포고된 최초의 [[민주주의]]적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모든 잔존해 있던 [[봉건]]적 권리들을 무상으로 완전히 철폐하였고, 몰수된 망명귀족들의 토지를 소규모 구매자가 매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진시켰다. 아이티의 흑인노예혁명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영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1792년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 중 일부 내용을 보자. > 여러분의 법령 중 하나에서 여러분이 노예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과 식민지들의 최상의 이익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뒤엎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 여러분의 영광, 여러분의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식민자들이 우리를 위협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것을 법령화하게 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의 전복유 원하지 않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자유록기를 원하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식민지 대표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 ~ 153 [[프랑스 혁명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총동원을 표방한 [[징병제]]가 실행되었으며,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경제적 통제를 실행했다. 완전히 붕괴해버리다시피 한 [[장교]]단을 충원하기 위해 하사관, 병사들에게 능력과 실적에 따른 승진 기회를 제공했으며, 혁명군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공안위원회 파견의원들이 전선에서 군대를 독려했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공화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94년 3월 경에는 이전의 3배에 달하는 군대를 1793년 3월의 절반에 불과한 비용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공화국은 적군을 압도했으며, 혁명군은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군사적인 우세를 시작해 나갔다. 이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한 유일한 재원이었던 [[아시냐]] 화폐의 가치조차도 최하 3분의 1 선에서 지켜내기까지 했다.[* 엄청난 가치 하락이지만, 실상은 아시냐 지폐는 1789년 발행된 이후 계속 가치가 급락한 상황이었고, 이를 공안위원회가 전시통제경제를 통해 전쟁에도 불구하고 안정시킨것에 가깝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아시냐는 다시 폭락해, 결국 1797년 30분의 1의 가치로 환금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파리 코뮌의 각 구들을 비폭력적으로 무장 해제하는 데 성공하여, 중앙집권과 안정적인 의회의 통치가 가능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